인도 대법원은 2023. 12. 6. 중재합의의 구속력 범위에 관한 중요한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Cox and Kings Ltd. v. SAP India Private Ltd. Arbitration Petition (Civil) No. 38 of 2020]. 인도 대법원은 위 판결에서 일정한 요건이 충족되면 기업집단 이론(Group of Companies Doctrine)에 따라 중재합의를 한 회사뿐만 아니라 해당 회사와 동일 기업집단에 속하는 계열회사에도 중재합의의 효력이 미칠 수 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우리 기업이 이를 유리하게 활용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예측하지 못하게 국제중재절차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도 관련 사업을 하는 우리 기업이 인도 기업과 중재합의를 할 때는 위 판결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위 판결의 요지와 그 시사점을 살펴보겠습니다.
I. 중재합의의 의의와 구속력
이미 발생하였거나 앞으로 발생할 수도 있는 분쟁을 중재로 해결하기로 하는 당사자간의 합의를 중재합의라고 합니다. 유효한 중재합의가 있으면 그 합의의 대상인 분쟁에 대해서는 국내법원의 관할권은 배제되고, 중재합의에도 불구하고 법원에 소를 제기하면 각하(우리나라 중재법 제9조 제1항 참조) 또는 중단(영국, 미국 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재합의의 당사자들은 원칙적으로 국내소송이 아닌 중재절차에 의해 분쟁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러한 중재합의의 구속력은 원칙적으로 중재합의의 당사자에게만 미칩니다. 따라서, 어떤 기업이 중재합의의 당사자인 기업과 계열관계에 있다고 하여 그것만으로 해당 중재합의에 구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II. 인도 대법원 판결의 요지
그런데 인도 대법원은 2023. 12. 6. 선고한 판결에서 기업집단 이론을 적용하여 중재합의를 체결한 회사뿐만 아니라 해당 회사와 동일한 기업집단에 속한 계열사에게까지 중재합의의 효력이 미칠 수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업집단 원칙(The Group of Companies Doctrine)을 통한 중재합의의 당사자 확정
인도 대법원은 중재합의는 계약으로서 당사자에게만 효력을 미치는 것이 원칙(The Doctrine of Privity)이지만 비서명 당사자도 중재합의에 구속되고자 하는 동의를 서명이 아닌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비서명 당사자가 중재합의에 구속되고자 하는 동의를 표현한 바가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원칙 중 하나로 기업집단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기업집단 원칙을 적용하여 중재합의의 범위를 넓게 인정할 수 있는 근거로, 인도 대법원은 기업실무에 비춰볼 때 중재합의의 형식적 체결 당사자가 된 회사와 실제로 해당 계약에 관하여 협상을 진행하거나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는 회사가 상이할 수가 있고, 이러한 경우 중재절차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에 대한 동의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형식성을 강조하는 것은 비서명 당사자를 중재합의의 범위에서 제외함으로써 절차의 중복과 분쟁의 파편화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
2. 기업집단 원칙(The Group of Companies Doctrine) 적용 요건
인도 대법원은 기업집단 원칙에 따라 중재합의의 효력이 미치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누적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로 (i) 당사자들의 의사 (ii) 서명 당사자와 비서명 당사자 사이의 관계 (iii) 공통된 대상물 (iv) 문제된 거래의 복합적 성격 (v) 계약의 이행을 제시하였습니다. 상대방 당사자에게 중재합의의 구속력을 주장하려는 자는 법원 또는 중재판정부가 심증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위 요소들의 존재를 증명할 증명책임을 지며, 위 요소들의 판단은 구체적 사실관계에 달린 문제로서 특정한 요소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갖는지 일률적으로 정하기 어렵고 5개 요소 전부가 누적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요소인 당사자들의 의사는 중재합의의 효력이 미치기 위한 본질적 요소로서, 기업집단 원칙 법리에서 고려하는 다른 요소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첫 번째 요소인 당사자들의 의사를 확정하기 위한 추가적인 고려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요소인 서명 당사자와 비서명 당사자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인도 대법원은 서명 당사자와 비서명 당사자 사이에 상업적인 관계(commercial relationship)이 있다는 점만으로 인해 동일 기업집단에 속하는 기업 전체가 해당 기업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중재합의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며, 단순히 특정 기업들이 “경제적 단일체(a single economic unit)”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중재합의에 구속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즉 기업집단 원칙의 적용을 통해 중재합의의 범위를 넓게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기업집단의 존재는 당사자들의 상호 의사를 확정하기 위해 고려할 수 있는 추가적인 요소 중의 하나일 뿐 그 자체로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요소인 공통된 대상물(subject matter)의 경우, 비서명 당사자의 행위가 중재합의의 내용이 된 대상에 관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중재합의의 기초가 된 계약의 주된 내용이 건강 관련 상품의 유통에 관한 것이라면, 기업집단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비서명 당사자의 행위 역시 건강 관련 상품의 유통에 관련된 것이어야 합니다.
네 번째 요소인 복합적 거래(composite transaction)의 경우 다수의 약정을 수반하는 거래를 의미하며, 이때 주된 약정 또는 주된 약정의 대상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분쟁의 경우 주된 약정에서 규정된 중재합의의 효력이 미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요소인 계약의 이행(performance of contract)에 관하여, 인도 대법원은 비서명 당사자가 주된 계약의 이행에 참여하였다는 사정을 가장 중요한 고려요소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비서명 당사자가 계약의 협상, 체결, 이행, 해지 등에 참여하였다는 사정은 해당 당사자가 중재합의를 포함하는 계약에 대한 진정한 당사자라는 외관을 형성할 수 있으며, 계약의 상대방 당사자가 이러한 외관을 신뢰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존재하는 경우 기업집단 원칙의 적용에 따라 비서명 당사자를 중재합의의 당사자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III. 시사점
인도 대법원의 판결은 인도에 진출하거나 인도 기업과 거래하는 한국 기업들이 중재를 통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 대법원 판결 이전에는 인도 현지에서 특정 기업집단과 분쟁이 생길 경우 동일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중재합의에 서명한 당사자에 대해서는 중재절차를 진행하고, 중재합의에 서명하지 않은 계열사에 대해서는 인도 법원에서의 소송을 진행하는 형태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피했고, 시간과 비용이 과도하게 소요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위 대법원 판결은 기업집단 원칙을 인정하는 근거로 ‘절차의 중복, 분쟁의 파편화’를 예방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거론하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 기업집단에 속한 우리나라 기업이 인도 기업과 중재합의를 한 경우, 인도 대법원 판결에 의하면 일정한 요건이 충족되면 위 중재합의의 구속력이 기업집단 내의 다른 기업에 미칠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중재합의에 직접 서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계약의 협상 등에 참여하는 등으로 계약 상대방에게 중재합의의 당사자라는 외관을 형성하였다면 기업집단 원칙에 따라 중재합의 당사자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도 기업과 중재합의를 하는 경우에는 이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해당 대법원 판결에 의하더라도 단순히 동일한 기업 집단에 속하여 경제적 이해관계가 공통된다는 이유만으로 중재합의의 효력을 확장할 수는 없고, 우리 기업이 기업집단의 원칙을 통해 비서명 당사자인 기업에 대해서도 중재합의의 효력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계약의 협상, 체결, 이행 단계에서부터 인도 대법원이 제시한 다섯 가지 요소에 관련된 자료를 충분히 확보해둘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