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영국 「중재법(Arbitration Act)」의 개정 배경
중재지가 영국인 중재에 대해서는 영국 「중재법(Arbitration Act) 1996」(이하 “「중재법 1996」”)이 적용됩니다. 영국 법무부는 2021년 「중재법 1996」의 25주년을 맞이하여, 국제중재지로서의 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법률위원회(Law Commission)[1] 에 법령의 재정비를 요청하였습니다. 법률위원회는 「중재법 1996」에 대한 근본적인 개정은 필요하지 않음을 전제로, 세부 내용에 대한 개정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제시된 개정안은 2023. 11. 21. 영국 상원에 ‘Arbitration Bill [HL]’의 제명으로 제출되었고, 2024년 중순경 국왕의 승인을 받아 공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추후 개정되어 발효될 영국 중재법(이하 “「중재법 2024」”)의 핵심 내용과 주목해야 할 시사점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II. 주요내용
1. 「중재법 2024」의 적용 범위
「중재법 2024」는 기존 「중재법 1996」의 일부 조항을 개정하고 새로운 조항을 신설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이 개정된 내용들은, 중재합의 또는 중재계약의 체결일자와 상관없이, 「중재법 2024」이 발효되는 날 이전에 개시된 중재 절차 및 해당 중재 절차와 관련된 법원 절차(예를 들어, 중재판정의 집행절차)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2]
2. 중재합의의 준거법 규정 신설
당사자가 중재합의의 준거법을 지정하지 않은 경우, 일반적으로 중재지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견해와 중재합의 또는 중재조항을 포함한 주된 계약의 준거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대립합니다. 영국 판례는 대법원 판례 Enka v. Chubb[3] 에 의하여, 원칙적으로는 주된 계약의 준거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중재법 2024」는 위 판례의 입장을 취하는 대신, ‘당사자가 중재합의의 준거법을 지정하지 않은 경우, 중재지법이 준거법이 된다’는 조항을 신설하였습니다.[4] 이를 통하여 당사자들이 합의한 중재지의 법이 중재합의의 준거법이 되므로 보다 간명하게 중재합의의 준거법을 판단할 수 있고, 예측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3. 중재인의 고지의무 법제화
일반적으로 중재인의 공정성이나 독립성에 관하여 의심을 살 만한 사유가 있을 때 중재인은 스스로 지체 없이 이를 당사자들에게 고지할 의무, 이른바 ‘고지의무(duty of disclosure)’를 부담합니다. 영국에서는 대법원 판례 Halliburton v. Chubb [5] 등 판례에 의하여 중재인에게 고지의무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중재법 2024」는 중재인의 고지의무를 명문의 법령으로 법제화하는 조항을 신설하였습니다.[6] 이에 따르면, 중재인은 공정성에 관하여 합리적 의심을 살 만한 사유가 있음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면 지체없이 이를 당사자들에게 고지하여야 합니다. 또한, 위 조항은 강행규정으로, 당사자의 합의로 그 적용을 배제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만, 「중재법 2024」는 고지의무의 구체적인 대상 및 범위 등에 대해서는 규정하지 않는바, 이는 개별 사건의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달리 판단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4. 중재인 면책 강화
「중재법 1996」에 의하여, 중재인은 신의성실에 반하는, 즉 해의(bad faith)에 기한 것이 아닌 한 직무수행 중의 행위나 해태로 인한 책임에서 면제됩니다.[7] 이는 중재인이 책임부담을 우려하지 않고 강력하고 공정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중재법 2024」는 이러한 중재인의 면책 범위를 확대하여, 중재인은 (i) 해의에 기한 것이 아닌 한 해임신청으로 인한 비용으로부터 면책되고,[8] (ii) 불합리한 경우가 아닌 한 사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도 면책되는[9] 내용으로 개정되었습니다.
5. 간이 판정 권한 도입
「중재법 2024」는 당사자의 신청이 있으면, 중재판정부는 당사자들의 특정 주장이 인용될 실질적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no real prospect of success) 해당 주장에 대하여 간이 판정(an award on a summary basis)을 내릴 수 있다는 조항을 신설하여, [10] 중재판정부에 간이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명시적으로 부여하였습니다. 간이 판정의 구체적인 절차는 중재판정부의 재량에 의하여 사안에 따라 개별적으로 달리 진행될 수 있습니다.
간이 판정 권한은 국제중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도입한 절차인데, 런던국제중재법원(LCIA),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SIAC), 스톡홀름 상업회의소 중재기관(SCC) 등의 다른 국제중재기관에서도 두고 있습니다. 해당 권한은 당사자간 합의에 따라 배제할 수 있습니다.
6. 긴급중재인의 권한 명확화
중재판정부가 구성되기 전에 긴급한 보전처분의 필요가 있는 경우 권리구제의 공백을막기 위하여 긴급중재인을 선임하여 긴급중재절차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중재법 2024」에서는 일반 중재인의 권한이 이러한 긴급중재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개정되었습니다.[11] 이에 따라, 긴급중재인은 중재 당사자가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 법원을 통해 집행이 가능한 강제 명령(peremptory order)을 내릴 수 있고,[12] 임시적 처분도 구할 수 있습니다. [13]
7. 법원의 임시적 처분의 범위 명확화
「중재법 1996」에 의하면, 영국 법원은 중재 절차와 관련하여 증거보전 등의 임시적 처분을 할 수 있는데,[14] 중재절차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영국 판례에 의하여서도 정립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중재법 2024」는 법원의 임시적 처분이 중재절차에서도 제3자, 예를 들어 관련 증거를 보유한 제3자나 관련 자금을 보유하는 은행 등에 대해서도 내려질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습니다.[15] 영국 법원 절차에 대한 임시적 처분의 범위와 동일하게 개정되었다고 평가됩니다.
8. 중재판정 취소절차 개선
「중재법 1996」에 의하면, 중재합의의 대상이 아닌 분쟁에 대하여 중재절차가 개시되는 등 중대한 관할 위반이 있는 경우, 중재판정부는 관할 위반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고, 중재판정이 내려진 경우라면 법원도 중재판정 취소소송을 통하여 관할 위반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습니다. [16] 이미 중재판정부가 중대한 관할 위반에 대하여 판단하였더라도, 법원의 취소소송 절차에서 다시 전면적인 심리(full hearing)가 이루어집니다.
「중재법 2024」는 동일한 쟁점으로 인하여 당사자들의 시간과 비용이 중복하여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원칙적으로는 취소소송 절차에서는 새로운 취소사유나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는 것을 금지하고 증거조사도 다시 하지 않도록 개정되었습니다.[17]
III. 시사점
「중재법 2024」는 전면적인 개정은 아니지만, 영국 중재의 법적 틀을 보다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흐름에 맞춤으로써, 영국이 싱가포르 등 다른 국제중재지들 중에서도 매력적인 선택지로 평가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였다고 해석됩니다. 특히 개정된 사항들 중 대부분은 중재에 의한 공정한 분쟁 해결을 도모하고 불필요한 지연과 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영국의 국제중재지로서의 시장선도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에 기여할 것으로 평가됩니다. 아울러 「중재법 2024」는 그간 영국 판례 등에 의하여 논의되어 정리가 필요하였던 법적 쟁점들을 정리함으로써, 영국 중재를 선택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예측가능성을 제공하여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전세계의 다수 기업들이 영국(런던) 중재를 중재지로 하는 중재합의를 다수 수용하고 있기에 한국 기업들은 섭외 분쟁에 대응함에 있어 이러한 영국 중재법의 개정 내용과 시사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아가 한국 중재도 국제중재지로서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하여, 이러한 주요 중재 친화적 국가들의 입법적 흐름을 고찰하여 한국 중재의 제도적 발전에 반영할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겠습니다.
- 영국의 기존 법규를 재검토하고 개정을 제안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독립 기구입니다.
- Arbitration Bill, clause 17
- Enka Insaat Ve Sanayi AS v. OOO Insurance Company Chubb [2020] UKSC 38.
- Arbitration Bill, clause 1.
- Halliburton Company v Chubb Bermuda Insurance Ltd [2020] UKSC 48.
- Arbitration Bill, clause 2.
- Arbitration Act 1996, section 29.
- Arbitration Bill, clause 3.
- Arbitration Bill, clause 4.
- Arbitration Bill, clause 7.
- Arbitration Bill, clause 8.
- Arbitration Act 1996, section 41, 42.
- Arbitration Act 1996, section 44.
- Arbitration Act 1996, section 44.
- Arbitration Bill, clause 9.
- Arbitration Act 1996, section 30, 67.
- Arbitration Bill, clause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