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상사법원(Commercial Court)은 최근, 대러시아 제재 법령상 면책 규정을 영국의 공공질서(public policy)로 존중하여 중재판정의 집행을 거부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배척하고, 약 2억 1,400만 유로 상당의 LCIA 중재판정에 대한 집행허가결정을 유지하였습니다(OWH SE i.L. v RTI Ltd & Anor [2026] EWHC 1015 (Comm)).
이번 판결은 제재대상자(designated person)와의 연관성 때문에 대금 지급이 문제되는 중재판정의 집행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제재 법령에 담긴 공공질서가 중재판정 집행에 관한 공익에 언제나 우선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판결입니다.
I. 사안의 개요
이 사건 분쟁은 러시아 은행 VTB가 다수 지분을 보유한 독일 금융기관인 OWH와, 러시아 알루미늄 그룹 Rusal의 간접 자회사인 Jersey 법인 RTI 사이의 통화스왑 거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양사는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하고 LCIA 중재조항을 둔 ISDA 기본계약(Master Agreement)에 따라 통화스왑 거래를 하였고, Rusal이 RTI의 채무를 보증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영국과 Jersey가 VTB를 제재대상자로 지정하면서 VTB와 OWH의 지분 관계가 분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2022년 2월 RTI는 OWH의 마진콜에 응할 경우 VTB에 자금이 간접적으로 제공될 수 있다는 이유로 콜에 따른 지급을 거절하였고, OWH는 이를 채무불이행사유(event of default)로 삼아 거래를 종료하고 주채무자인 RTI와 보증인인 Rusal을 상대로 LCIA 중재를 제기하였습니다.
콜에 따른 지급을 요구한 OWH는 제재대상자가 아니었지만, 영국과 Jersey의 제재 모두 제재대상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자금을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하기 때문에 제재를 준수한다는 합리적 믿음하에 이루어진 작위·부작위에 대해서는 민사책임을 면제하는 규정을 함께 두고 있습니다. 지급이 제재 위반에 해당한다고 합리적으로 믿고 지급을 거절한 당사자라면, 이후 지급 청구를 받더라도 면책을 주장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면책 규정은 영국법에서는 2018년 제재 및 자금세탁방지법(SAMLA) 제44조에, Jersey법에서는 2019년 제재 및 자산동결법(SAFL) 제46A조에 각각 마련되어 있는데, Jersey의 제46A조가 2022년 6월 초에야 시행되었다는 점은 이후 절차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었습니다.
LCIA 중재판정부는 OWH의 계약 종료 통지가 유효하다고 판단하고 RTI와 Rusal에게 약 2억 1,400만 유로의 지급을 명하였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중재절차 중에 제재 쟁점이 다루어진 방식입니다. RTI는 중재에서 SAFL 제46A조에 기한 항변을 별도로 제기하지 않았고, 판정부 역시 마진콜에 따른 지급이 실제로 제재 위반인지 판단하지 않은 채, RTI가 지급의무를 면할 수 있었을 ISDA 기본계약상 조항들을 원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책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위법성(Illegality) 조항에 관하여는 신속한 통지가 원용의 선행조건임에도 RTI가 이를 이행하지 않아 계약상 원용이 배제된다고 보았고, 지급의무를 정지시킬 수 있는 '관련 제재 사유(Relevant Sanctions Event)'의 정의에는 애초에 Jersey 제재 법령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중재판정이 내려진 뒤에도 RTI와 Rusal은 여러 경로로 다투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Jersey에서 진행된 집행 절차에서 RTI는 SAFL 제46A조에 따라 민사책임이 면제된다고 주장하였으나, Jersey 왕립법원과 항소법원은, 제46A조가 그 시행 전에 있었던 RTI의 지급 거절에 소급 적용되지 않고 지급 거절 당시에는 이에 상응하는 공공질서상 보호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배척하였고, 추밀원(Privy Council)에서 상고에 대한 허락을 기각함으로써 Jersey 법원절차는 종결되었습니다.
한편 영국에서는 OWH가 상사법원으로부터 중재판정 집행허가를 받았고, Rusal이 집행허가 취소를 신청하면서 이번 판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Rusal은 마진콜에 따른 지급이 제재 위반으로 위법하다거나 SAMLA가 RTI나 Rusal에게 직접 적용된다고 주장하지 않고, 영국과 Jersey의 제재 체계가 서로 정합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이상 RTI에게 인정될 수 있는 SAFL 제46A조상 면책 항변을 영국 법원이 영국의 공공질서 차원에서 존중하여 중재판정의 집행을 거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II. 영국 법원의 판단
영국 법원은 Rusal의 신청을 기각하고 집행허가결정을 유지하였습니다.
법원은 이 사건의 본질을 (i) 중재판정의 종국성을 존중하고 이를 집행할 공익과 (ii) 제재 체계의 기초를 이루는 공공질서 간의 충돌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가치가 우선하는지를 판단함에 있어, 지급 자체를 위법하게 만드는 본질적 금지규정(primary prohibition)과 SAMLA 제44조나 SAFL 제46A조와 같은 부수적 규정(ancillary provision)을 구별한 뒤, 후자가 반드시 전자와 같은 공공질서적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법원은 문제된 면책 규정에 담긴 공공질서가 중요하기는 하나, 집행을 거부하여야 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고 보았습니다. 우선 면책 항변은 실제 위법성과 달리 지급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어서 그 원용 여부가 당사자의 선택이고, 이 사건에서는 영국이든 Jersey든 제재 법령의 실제 위반이 있었다는 주장조차 없었으며, 해당 쟁점이 중재절차 중에 전혀 제기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증거나 중재절차에서 제기하지 않은 경위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는 사정이 고려되었습니다. 법원은 중재절차 중에 제기되지 않은 사정이 집행 단계에서 공공질서를 주장하는 것을 봉쇄하는 절차적 장애까지는 아니지만, 두 공익을 형량할 때 고려할 수 있는 요소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나아가 법원은 보증인인 Rusal의 지위와 관련하여, Rusal은 Jersey 법인이 아니므로 SAFL 제46A조를 직접 원용할 수 없고, 설령 향후 Jersey에서 RTI에 대한 집행이 최종적으로 좌절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는 공공질서에 근거하여 Rusal에 대한 영국 내 집행을 거부할 근거는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III. 시사점
- 중재판정의 종국성과 이를 집행할 대한 공익은 매우 중요한 고려요소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제재 관련 공공질서가 원용되면 법원은 문제된 정책의 성격과 무게를 집행의 이익과 견주어 판단하게 되는데, 이때 지급 자체를 금지하는 본질적 규정과 합리적 믿음에 기초한 법정 면책과 같은 부수적 규정은 서로 다른 무게로 평가되며, 전자가 후자보다 무겁게 취급됩니다.
- 제재 관련 항변은 가능한 한 중재절차 중에 제기하고 입증해 두어야 합니다. 중재절차 중에 제기하지 않았다고 하여 집행 단계에서 공공질서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항변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정이 공익 형량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 제재로 인한 위법성을 이유로 계약상 구제수단을 청구할 때는 통지 요건을 비롯한 계약상 관련 요건을 엄격히 준수해야 합니다.
- 주채무자에게 적용되는 법정 면책에 따라 다른 jurisdiction에 설립되어 있는 보증인까지 항상 보호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재판정 집행시 판정채무자가 갖는 각각의 법적 지위를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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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크리스 메인워링 테일러 외국변호사(영국), 박윤정 외국변호사(영국, 미국 New York주), 김상철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