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국 항소법원은 Tonzip Maritime (Singapore) Pte Ltd v 2 Rivers Pte Ltd [2026] EWCA Civ 641 판결을 통해 제재 조항(sanctions clause)에 근거하여 계약상 의무 이행을 거부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하였습니다. 이 판결에서 항소법원은 항해용선계약에서 선주가 제재 조항을 원용하여 선적 의무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그 지시에 응할 경우 제재 위반이 발생할 개연성이 더 높다(more likely than not)는 점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고, 제재 책임이 발생할 실질적 위험(real risk)이 있다는 합리적 판단(reasonable judgement)이 있었다면 충분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I. 사건의 개요
1. 기초 사실관계
원고 Tonzip Maritime (Singapore) Pte Ltd(이하 "선주")는 2021. 11. 5. 피고 2 Rivers Pte Ltd(이하 "용선자")와 사이에 선박 "CATALAN SEA"호(이하 "본건 선박")로 러시아 발트해 연안 항구로부터 지중해까지 원유를 운송하기로 하는 항해용선계약(이하 "본건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본건 계약에는 무역·경제 제재 준수 조항(Trade and Economic Sanctions Compliance Clause, 이하 "EPS 제재 조항")이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본건 선박에는 용선자가 러시아 석유회사 Neftyanaya Kompaniya Neftisa("Neftisa")와 체결한 매매계약에 따라 Neftisa의 원유가 선적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Neftisa의 실질적 소유자이자 이사회 의장이던 Mikhail Gutseriev(이하 “Gutseriev”)는 2021. 6.경 및 2021. 8. 9.에 EU 및 영국에 의해 제재 대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2021. 7.경 Gutseriev가 자신의 Neftisa 지분 대부분을 형제에게 이전하고, 이사회 의장직에서도 물러났다고 보도되었습니다.
2021. 11. 17. 본건 선박이 선적 준비를 마쳤으나, 선주는 Neftisa가 EU와 영국의 제재 대상자인 Gutseriev와 연관성이 있음을 알게 되어 화물의 선적을 거부하고 대체 항해 지시를 요청하였습니다. 용선자는 제재 노출 위험이 없다고 선주를 설득하려 하였으나, 선주가 거부함에 따라 2021. 11. 24. 선주의 선적 거부를 이유로 본건 계약 해지를 통보하였습니다. 선주는 같은 날 위 해지 통지가 이행거절에 해당한다고 보아 이행거절에 의한 계약 위반(repudiatory breach)을 이유로 본건 계약을 해지하였습니다.
2. 쟁점
선주가 제재 조항을 근거로 계약상 주요 의무(화물 선적)의 이행을 거부할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되었고, 이에 따라 제재 위반을 이유로 계약상 주요 의무의 이행을 거부하려면 어느 정도 수준의 판단을 요구하는지가 쟁점이 되었습니다.
본건 계약의 EPS 제재 조항 (C)항은 "선주는, 선주의 합리적 판단에 따라 제재에 의하여 금지되거나(prohibited by sanctions) 또는 선주·본건 선박·그 관리자·선원·보험자·재보험자를 제재에 노출시키게 될 때(will expose … to sanctions) 운송·거래·항해·선박간 이송 기타 서비스에 관한 어떠한 지시에도 응할 의무가 없고, 항해 수행 중 그러한 위험(such risk)이 발생하는 경우 선주는 추가 이행을 거부할 수 있으며 용선자는 대체 항해 지시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본건에서는 EPS 제재 조항 (C)항의 "제재에 노출된다(expose to sanctions)"는 문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즉 ① 선주가 지시에 응할 경우 제재 위반의 개연성이 더 높다는 판단에 이르러야 하는지, 아니면 제재 위반의 실질적 위험이 있다는 판단으로 충분한지, 그리고 ② 선적 지시에 응하면 제재에 노출된다는 선주의 판단이 합리적인 판단인지 여부가 문제되었습니다.
II. 영국법원의 판단
1. 원심 법원의 판단
원심법원은 선주가 지시에 응할 경우 제재 위반의 개연성이 우위에 있다는 판단에 이를 필요는 없고, 제재 위반의 위험이 있다는 합리적인 상업적 판단에 이르면 족하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 기준을 적용하여도 선주가 확보한 자료는 의무이행거부 당시 Gutseriev가 Neftisa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선주 스스로도 그 지배의 존속 여부를 알지 못한다고 인정한 이상, 선주의 판단은 추측(speculation)에 불과하여 객관적으로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2. 항소법원의 판단
1) EPS 제재 조항 (C)항의 해석
항소법원은 (C)항의 "제재에 노출된다(expose … to sanctions)"가 제재를 실제로 위반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위반할 위험에 놓인다(put at risk)는 의미이고, 선주가 이 조항을 근거로 의무 이행을 거부하려면 의무를 이행할 경우 제재를 위반할 개연성이 더 높다(more likely than not)고 까지 판단할 필요는 없고, 제재 위반의 실질적 위험이 있다고 합리적으로 판단(reasonable judgement)하면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항소법원은 먼저 제재 조항의 문언에 주목하였습니다. 제재 조항 (C)항은 "금지(prohibited)"와 "노출(expose)"을 나란히 규정하는데, "금지"가 제재 위반 자체를 뜻하기에 별도로 명시한 "노출"은 그보다 낮은 단계인 위반의 위험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나아가, 항소법원은 상업적 맥락(commercial context)도 이러한 해석에 부합한다고 보았습니다. 선주는 선적인의 실질적 소유·지배나 화물의 출처·목적지 등 제재 적용 여부를 좌우하는 사정을 용선자보다 알기 어렵고, 사후에 이를 심사하는 제재당국과 달리 충분한 정보도 시간도 없이 신속히 결정하여야 하는 사정을 고려하면, 제재를 위반할 개연성이 더 높다는 판단까지 요구하기보다 실질적 위험에 대한 합리적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보았습니다.
2) 선주의 판단이 합리적이었는지 여부
항소법원은 Gutseriev가 제재 대상으로 지정되자마자 대가에 관한 정보도 없이 Neftisa 지분을 형제에게 넘긴 것은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형식적 이전(cosmetic transfer)일 수 있고, 그렇다면 Gutseriev가 여전히 Neftisa를 지배하고 있을 위험이 남으며, 관련 보고서 역시 Neftisa를 "제재 대상 개인과 연관됨"으로 기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바탕으로 제재 위험이 있다는 선주의 판단은 합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판단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항소법원은 선주의 의무이행 거부가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III. 시사점
제재 조항에 근거하여 계약상 의무의 이행을 거부할 수 있는지 여부는 결국 개별 계약 문언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본 항소법원의 판결은 국제거래 업무에서 자주 문제될 수 있는 제재 위험과 관련하여 제재 조항에서 자주 사용되는 “제재에 노출된다(expose to sanctions)”는 문구에 대한 해석의 기준을 제재 위반의 개연성이 아닌 실질적 위험에 관한 합리성으로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향후 제재조항에 근거하여 계약상 의무이행을 거부할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참고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