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러시아 당국의 케르치 해협(Kerch Strait) 통항 금지로 선박이 억류됨에 따라 발생한 분쟁에 관하여 최근 런던에서 중재판정이 선고되었습니다(London Arbitration 8/26 [(2026) 1210 LMLN 1]).
위 중재판정에서는 국가기관의 개입으로 해협의 통항이 금지되었을 때 그 위험을 선주와 용선자 중 누가 부담하여야 하는지가 문제되었고, 이를 둘러싼 다수의 법적 쟁점—전쟁위험 조항(Voywar 1993), 안전항(safe port), 이행불능(frustration)—이 종합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이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된 현재의 국제 해상운송 환경에서 참고할 만한 선례가 됩니다.
I. 사건의 개요
1. 기초 사실관계
청구인인 선주(이하 "선주")와 피청구인인 용선자(이하 "용선자")는 선주가 아조프해의 항구로부터 흑해의 항구까지 질산암모늄(ammonium nitrate) 화물(이하 “본건 화물”)을 운송하기로 하는 항해용선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계약 체결 당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미 상당 기간 진행 중이었고, 2022년 10월 8일 러시아 대통령령은 연방보안국(Russian Federal Security Service, 이하 “FSB”)에 케르치 해협에서 선박·차량의 이동을 제한·금지할 권한을 부여하였습니다.
해당 선박은 2023년 1월 9일 본건 화물을 선적하고 13일 출항하였으나, 15일 케르치 해협 입구에서 본건 화물이 폭발물에 사용될 수 있는 물질이라는 이유로 FSB에 의해 진입이 거부되며 억류되었습니다. 이후 선박은 약 2개월간 통항 허가를 기다리며 대기하다가, 용선자의 2023년 3월 15일자 지시에 따라 선적항으로 회항하여 2023년 3월 23일 경 본건 화물을 양하하였습니다.
선주는 용선자를 상대로 선박 억류(detention)로 인해 발생한 손해와 비용의 배상을 구하는 중재를 제기하였습니다.
2. 법적 쟁점
선주는 선박 억류 기간 동안의 용선계약상 체선료율에 따른 손해 및 비용을 청구하면서, 아래와 같은 용선자의 계약 위반을 주장하였습니다.
- 선박의 억류를 초래한 위험화물을 선적한 점
- "안전항 선석 1곳, 상시 부상, 상시 이용가능(1 good safe port berth always afloat always available)" 보증에 위반하여 양하항을 지정한 점
- 선박의 해협 통과에 필요한 화물 서류를 준비하고 관련 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점
- 용선계약 제17조 전쟁위험 조항(Voywar 1993) 또는 그 밖의 근거에 따라 대체 안전항을 신속히 지정하지 아니한 점
이에 대해 용선자는 계약 체결 당시 항해에 아무런 법적 장애가 없었고, 선박 억류는 러시아 당국의 조치라는 예견 불가능한 사유 때문에 발생하였으며, 용선계약은 2023년 1월 20일 경 이행불능(frustration)으로 종료되었다고 항변하였습니다.
II. 중재판정부의 판단
1. 위험화물 주장 – 기각
중재판정부는 본건 화물이 법률상 운송이 금지된 위험화물이라는 선주의 주장을 배척하였습니다. 용선자가 제출한 러시아법 전문가 의견에 따르면, 2023년 3월 13일까지 질산암모늄의 케르치 해협을 통한 해상운송을 제한하는 법률이 시행된 바 없었습니다. 중재판정부는 당사자들이 용선계약 체결 또는 화물 선적 시점에 FSB의 조치를 예상할 수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2. 안전항 보증 위반 주장 – 기각
중재판정부는 안전항 보증은 용선자가 양하항을 지정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해당 항구가 장래에 있어(prospectively) 안전할 것을 담보하는 것이고, 계약 체결 후에 예상치 못한 이례적 사태가 갑자기 발생하여 안전하던 항구가 위험해진 경우까지 포함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중재판정부는 FSB의 통항 금지가 바로 이러한 계약 체결 이후 발생한 이례적 사태(abnormal occurrence)에 해당한다고 보아, 용선자에게 안전항 보증 위반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3. 서류 준비·조치 불이행 주장 – 기각
선주는 용선자가 관련 서류에 화물의 용도를 기재하고 그 취지를 러시아 당국에 제출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나, 중재판정부는 러시아법상 그러한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용선자가 선박 억류 이후 FSB에 화물 용도를 밝히는 서신을 보냈지만 통항 금지는 유지되었던 점을 고려했을 때, 중재판정부는 당사자들이 가능한 조치를 모두 취했다고 보았습니다.
4. 전쟁위험 조항에 따른 대체항 지정 의무 위반 주장 – 인용
반면 중재판정부는 용선자의 대체항 지정 의무 위반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사건 용선계약 제17조에는 Voywar 1993 전쟁위험 조항이 편입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위험 조항에 따라 선주는 용선자에게 대체 양하항을 지정하도록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한편, 용선자는 그 요청에 응하여 대체항을 지정할 의무를 부담합니다.
중재판정부는 전쟁위험 조항이 포화나 나포 같은 물리적 위험뿐 아니라 억류·몰수와 같은 법률상 위험까지 포함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중재판정부는 용선자 스스로 선박이 분쟁 핵심 지역을 포함하는 항해에서 억류되었으며 FSB가 본건 화물을 안보상 위협으로 판단하여 통항을 금지하였다고 인정한 점을 지적하면서, 선주가 선박·선원·화물이 전쟁위험에 노출되었다고 판단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주가 2023년 2월 15일 대체 안전항 지정을 요청하였음에도 용선자는 3월 15일까지 이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습니다. 중재판정부는 용선자가 이상과 같이 대체항 지정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보고, 선주에게 억류기간 동안 발생한 손해를 배상 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5. 이행불능(Frustration) 항변
이행불능(frustration)이란 계약 성립 후 당사자 쌍방의 귀책사유 없이 예견할 수 없었던 사정이 발생하여 계약의 이행이 불가능해지거나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경우, 그 사정이 발생한 시점에 계약이 당연히 종료되고 당사자가 장래의 채무를 면하게 되는 영국법상의 법리입니다.
용선자는 FSB의 예측 불가능한 조치로 본건 용선계약이 이행불능이 되었다고 항변하였으나, 중재판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초 예정된 양하항으로 항해하는 것이 2023년 1월 말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은 맞지만, 용선계약 제17조가 전쟁위험으로 이행이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본건에는 이 조항이 우선 적용되므로, 따라서 계약이 이행불능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중재판정부는 설령 이행불능에 따라 계약이 종료되었다 하더라도 선주는 부당한 억류 기간의 선박 사용에 대해 보수(quantum meruit)로서 청구금액의 주된 부분을 여전히 회수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기준은 약정 체선료율이라고 설시하였습니다.
6. 손해배상(Quantum)
용선자는 손해액에 관하여 용선계약 제17조가 비용 배상만 규정하므로 체선료율을 손해 산정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중재판정부는. 용선계약 제17조가 용선자의 대체 미지정으로 인하여 발생한 억류손해 배상을 배제하고 있지 않고, 체선료율은 선박이 대기 상태일 때 선주가 배상 받을 수 있는 손해에 관하여 당사자들의 합의가 반영된 것이므로, 손해 산정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중재판정부는 용선자에게 선주가 대체항 지정을 요청한 2023년 2월 15일부터 용선자가 대체항을 지정한 3월 15일까지 28일 동안 체선료율 미화 4,400달러를 기준으로 산정한 미화 123,200달러와 그에 대한 이자 및 비용을 지급하라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III. 시사점
첫째, 중재판정에 따르면, 선주가 용선자의 안전항 보증 위반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계약 체결 시점에 그 위험 발생이 예견 가능하였어야 합니다. 따라서 호르무즈 해협이나 홍해처럼 정세가 급변하는 해역에서 선주가 안전항 보증에 근거하여 용선자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그러한 위험이 계약 체결 시점에 예견 가능했다는 점을 뒷받침할 근거가 필요합니다.
둘째, 전쟁이 발생한 경우를 별도로 규율하고 있는 VOYWAR나 CONWARTIME 같은 전쟁위험 조항이 편입된 계약에서는 이행불능 항변이 배척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위험이 현실화된 경우 이행불능에 의한 계약 종료를 섣불리 단정하기보다, 계약이 정한 대체항 지정 등에 대한 의무를 검토하여 신속히 이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용선계약에 편입되는 전쟁위험 조항에 의하면 용선자는 일반적으로 선주의 요청에 응하여 대체항을 지정할 의무를 부담할 수 있으므로, 전쟁위험 조항을 설계할 때에는 위험 현실화 시의 권리·의무, 비용 부담을 구체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