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상사법원(Commercial Court)은 최근 영국법상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의 해석에 관하여 실무상 유용한 지침을 제시하였습니다(ADM Industries Centers Ltd v Inerco Trade SA [2026] EWHC 1873 (Comm)).
법원은 계약에서 말하는 '예견할 수 없는(unforeseeable)' 사건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unimaginable) 사건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계약 체결 당시 그 발생 가능성이 상거래상 무시하여도 좋을 만큼 희박하였다면 예견할 수 없는 사건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동시에 이 사건 조항상 기한 내 통지는 불가항력을 원용하기 위한 선행조건(condition precedent)이라고 판단하여, 계약상 통지 요건을 엄격히 준수하여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불가항력 사유가 그 밖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더라도 통지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상대방에게 그로 인한 불이익이 없었다 하더라도 불가항력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I. 사안의 개요
이 사건 분쟁은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하고 GAFTA 48호 서식(GAFTA Form 48)이 적용되는 우크라이나산 옥수수 매매계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곡물을 선적하기 위하여 흑해에 진입하는 선박은 검사를 거쳐야 했는데, 매도인이 지명한 선박이 검사를 기다리던 중 러시아 검사관들이 11일 동안 러시아 선박이 아닌 입항 선박에 대한 검사를 중단하였고, 그 결과 해당 선박은 우크라이나 흑해 해역에 진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전까지 검사 중단은 통상 1~2일에 그쳤습니다. 매도인은 이처럼 장기화된 검사 중단이 '예견할 수 없고 회피할 수 없는 운송 또는 항행의 장애'에 해당한다고 보아 불가항력을 원용하였습니다.
GAFTA 48호 서식 제20조는 수출금지, 봉쇄, 테러행위, 적대행위, 파업, 폭동, 기계 고장, 화재, 결빙, 천재지변 등을 불가항력 사유로 열거하면서, 그중 하나로 '예견할 수 없고 회피할 수 없는 운송 또는 항행의 장애(unforeseeable and unavoidable impediments to transportation or navigation)'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어 불가항력 사유로 이행이 방해된 경우에는 그 기간 동안 계약 이행이 정지된다고 하면서, 다만 매도인이 사유 발생일로부터 7일이 되는 날 또는 선적기간 개시 21일 전 중 더 늦은 날까지 그 사유를 기재한 통지를 매수인에게 하여야 한다고 정하고 있으며, 이 통지 요건은 "provided that"이라는 문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도인은 검사 중단이 시작된 지 9일이 지난 후에 통지를 하였고, 매수인은 이를 거절하면서 당초 일정대로 선적의무가 존속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GAFTA 상소중재판정부(Board of Appeal)는 매도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약 312만 달러의 지급을 명하였고, 이에 매수인은 영국 중재법 제69조에 따라 법원에 항소를 제기하였습니다.
II. 영국 법원의 판단
1. 불가항력 조항상 예견가능성의 기준
법원은 계약 체결 당시를 기준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하여 이행에 영향을 미칠 확률이 상거래상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희박하다면, 그 사건은 '예견할 수 없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관념적으로 상정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예견 가능한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예견할 수 있는 사건인지는 해당 조항이 사용된 계약의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법원은 제20조가 함께 열거하고 있는 다른 사유들 상당수가 관념적으로는 상정할 수 있으나 드물고 예측하기 어려운 사건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예견할 수 없는'을 사건을 사실상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건으로 좁게 해석하는 것은 조항 전체의 구조와 맞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단순히 발생 가능성이 낮다는 사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도 분명히 하였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예견가능성이 정도의 문제일 수 있다고 본 점입니다. 법원은 “악천후는 예견할 수 있어도 사흘간 이어지는 허리케인까지는 예견할 수 없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짧은 기간의 검사 중단은 예견할 수 있었더라도 그것이 장기간 이어진 경우는 정도가 달라 예견할 수 없는 사건이 될 수 있다고 본 상소중재판정부의 판단을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2. 통지 조항의 준수
한편, 법원은 매수인에게 아무런 불이익이 없었으므로 7일의 통지 요건을 준수하지 못한 하자는 문제 삼지 않아도 된다고 본 상소중재판정부의 판단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이 사건의 맥락에 비추어 “provided that”이라는 문언을 “명백히 선행조건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았으며, 통지 요건은 당사자들이 각자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상거래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므로, 상대방에게 불이익이 없었다는 사정만으로 예외를 인정할 근거는 조항 어디에도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법원은 기한 내 통지가 제20조 원용의 선행조건이라고 보아, 불가항력 사유가 존재하였더라도 통지가 늦었다면 매도인은 해당 조항을 원용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습니다.
다만 이 판결이 모든 계약상 통지 요건이나 “provided that”이라는 문언이 언제나 선행조건에 해당한다는 취지는 아닙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개별 계약의 해석 문제입니다. 이 판결의 의미는 불가항력에 따른 구제를 받으려면 정해진 통지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점이 계약에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면, 그 요건이 엄격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한편 매도인의 통지가 실제로 기한을 넘긴 것인지는 통지 기간의 기산점이라는 별도의 쟁점과 연결됩니다. 계속되는 사건의 경우, 통지 기간은 그 사정이 계약상 불가항력 사유의 요건을 충족하게 된 때부터 기산될 수 있으며, 반드시 그 원인이 된 장애가 처음 발생한 시점부터 기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매도인은 1~2일 정도의 검사 중단은 예견할 수 있었더라도 중단이 그 기간을 넘어 계속된 시점에 비로소 '예견할 수 없는' 사유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법원은 원칙적으로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인정하면서도, 불가항력 사유가 실제로 언제 발생하였는지는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상소중재판정부가 그 시점을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원은 이 쟁점을 상소중재판정부로 환송하였습니다. 심리 결과 매도인의 통지가 7일의 기간을 넘긴 것으로 확인되면 매도인은 제20조를 적법하게 원용하지 못한 것이 되고, 그렇지 않다면 중재판정의 나머지 부분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III. 시사점
1. 불가항력은 결국 계약상 위험분배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어떤 사건이 '예견할 수 없는' 것인지는 해당 조항의 문언과 그 계약의 상거래상 맥락에 따라 결정됩니다. 일정한 수준의 장애가 예견 가능하였더라도, 규모나 기간에서 현저히 다른 장애는 예견할 수 없는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이는 이미 알려진 지정학적 위험이나 운송·공급망 위험이 내포된 계약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2. 통지 요건은 불가항력 항변의 선행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provided that”과 같은 문언이 구체적인 통지 기간과 함께 규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엄격한 준수가 요구될 수 있습니다. 통지가 선행조건에 해당하는 이상, 상대방이 이로 인해 아무런 불이익을 입지 않았다는 사정은 불이행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상대방이 이미 장애 발생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늦은 통지도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3. 통지 의무가 언제 발생하는지를 신중하게 확정하여야 합니다. 장애가 계속되거나 점차 확대되는 경우, 통지 기간은 원인이 된 장애가 처음 발생한 시점부터 진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 계약상 불가항력의 정의를 충족하게 되는지를 먼저 특정하고, 해당 통지 요건을 신속히 이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무적으로는 불가항력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 발생하면 즉시 내부적으로 보고·검토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계약상 가능한 가장 이른 단계에서 통지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4. 영국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해상운송, 건설, 원자재 거래를 비롯한 국제상거래에 관여하는 한국 기업으로서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불가항력 조항의 설계와 장애 발생 시의 대응 절차를 함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가항력 조항에는 어떠한 위험이 포섭되는지, 그 경우 인정되는 구제수단은 무엇인지, 통지 요건은 어떠한지가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불가항력에 해당할 수 있는 장애가 발생하면 이를 신속히 사업 부서와 법무 부서에 공유하여 계약상 통지 요건을 기한 내에 검토하고 이행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문 더보기]
저자: 크리스 메인워링 테일러 외국변호사(영국), 박윤정 외국변호사(영국), 김상철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