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주요 시사점
- 영국법상 이행보증(performance bond)의 수익자의 지급청구는 계약에 기반한 강력한 근거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기각될 수 있는 반면, 발행은행에 대한 지급금지 가처분신청은 사기행위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존재할 경우에만 인용됩니다. 계약분쟁, 상계 또는 청구의 형식적 결함에 근거한 주장만으로는 가처분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 지급청구의 내용 및 그 의도가 명확한 이상 서류상의 경미한 하자는 지급청구의 무효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 본드 콜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당사자는 신속하게 행동하고 지체 없이 구제수단을 강구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긴급대응의 부재는 추후 법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건설·상사 계약에서 이행보증은 공사이행, 지체상금 지급, 하자보증 의무 또는 계약의 전반적인 이행을 담보하는 수단으로 광범위하게 활용됩니다. 이행보증의 주된 기능은 수익자가 신속하게 자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으며, 시공자의 실제 책임 여부에 관한 분쟁은 그 이후 별도의 절차에서 해결하도록 하는 구조를 취합니다.
역사적으로 영국 법원은 수익자의 지급청구를 금지하거나 발행은행의 지급을 금지하는 가처분에 대하여 매우 제한적인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On-demand 지급에 대한 금지신청은 원칙적으로 사기행위의 명백한 증거가 존재하고 발행은행이 이를 인지하고 있는 경우에만 인용될 수 있습니다. 지급청구의 형식적 결함, 기초계약 분쟁, 또는 신의성실 원칙 등에 기초하여 법원의 관여범위를 확장하려는 시도는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최근 영국 고등법원은 CR Construction (UK) Co Ltd v Barclays Bank plc [2026] EWHC 202 (TCC) 판결을 통해 위 원칙을 재확인하였습니다. 본건 분쟁은 영국 맨체스터 소재 대형 건설 프로젝트 계약이 해지된 후, 발주자가 지체상금을 확정한 다음 약 247만 파운드 상당의 이행보증금을 청구하면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시공자는 해당 지급청구의 형식적 하자, 발주자의 기초계약 이행거절(repudiatory breach)로 인한 이행보증채무의 소멸, 및 상계로 인한 순 지급액의 부재를 주장하며 발행은행을 상대로 지급금지 가처분을 신청하였습니다. 한편 시공자의 주장 중 사기행위에 관한 주장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영국법상 가처분에 관한 확립된 판단기준을 적용하였습니다. 해당 기준에 따라 가처분신청이 인용되기 위하여는 재판을 통해 다퉈져야 하는 중대한 쟁점이 존재해야 하며, 손해배상은 적절한 구제수단이 될 수 없음이 소명되어야 하고 편의의 균형(balance of convenience)이 구제 인용에 유리하게 작용하여야 합니다. 특히 이행보증으로부터 비롯된 분쟁에서 발행은행을 상대로 지급금지를 구하는 경우에는, 은행이 인지하고 있는 사기행위에 관한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가처분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법원은 시공자의 가처분신청을 요건 심사단계에서 기각하였으며, 사기행위가 없는 한 시공자의 그 어떤 주장도 금지명령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발주자가 기초계약상 지급청구 권한이 없다는 시공자의 주장에 대하여 법원은 설령 해당 주장이 정당하다고 보더라도 사기행위가 없는 이상 은행을 상대로 한 지급금지 가처분신청은 인용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특히 법원은 수익자의 청구행위 자체에 대한 금지와 은행의 지급이행에 대한 금지를 구분함으로써 전자는 강력한 계약적 근거에 기반하여 제한적인 상황에서 허용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은행이 인지하고 있는 사기행위가 없는 한 불허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한편 법원은 위와 같이 판시하면서도 이 사건 이행보증의 인증 메커니즘에 비추어 시공자의 주장의 타당성을 심사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행보증은 발주자가 인증서를 발행하고 발주자의 대리인이 이를 확인서명(countersign)함으로써 시공자의 책임을 확정적으로 입증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시공자는 상계 및 지체상금 금액에 관한 분쟁을 근거로 주장을 제기하였으나, 법원은 해당 인증 메커니즘상 당사자 사이 인증서가 확정적 효력을 가진다는 합의가 이루어졌으므로 발행은행은 이를 원용할 권한을 가지며, 기초계약상 책임에 관한 분쟁은 지급의 선행요건이 아니라 후속 절차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법원은 기초계약에 대한 발주자의 이행거절을 시공자가 수락함으로써 이행보증이 소멸하였다는 주장 역시 기각하였습니다. 이 사건 이행보증에는 계약해지로 인해 보증인의 책임이 감소되지 않는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법원은 동 조항이 이행거절의 수락에 의한 해지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조항의 상업적 취지는 계약이 어떠한 방식으로 종료되었는지에 관한 분쟁이 있더라도 이행보증이 존속할 수 있도록 하려는 데에 있으며, 본 판결은 이러한 취지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법원은 시공자의 주장이 수익자에 대한 금지명령에 요구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며 은행을 상대로 한 가처분신청을 뒷받침하기에도 역부족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아울러 청구의 형식적 유효성에 대한 시공자의 이의도 기각되었습니다. 시공자는 그룹 레터헤드의 사용 및 관련 법인에 대한 언급 등 청구서류상의 불일치를 지적하였으나, 법원은 해당 서류에 일부 형식상 미흡한 점이 있음은 인정하면서도 그 내용이 모호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특히 법원은 청구서 전체를 살펴볼 때 "해당 문서들은 그 내용에 있어 다른 법인이 아닌 발주자의 청구서 및 인증서임은 중대한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며, 계약상 엄격한 형식요건이 없는 이상 경미한 형식적 하자는 청구를 무효화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습니다.
나아가 법원은 완전한 판단을 위해 임시구제의 요건을 검토하였습니다. 법원은 시공자가 제출한 회복불가능한 손해에 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점 및 재정적 불이익 또는 명예훼손에 대한 주장이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아울러 본안에 대한 임시구제를 명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 재정(裁定, adjudication)절차를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공자가 해당 절차개시를 지연한 점, 그리고 본드 콜 발생이 명백해졌을 당시 긴급하게 대응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켰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법원은 편의의 균형이 임시구제 청구의 인용에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습니다.
법원은 또한 이행보증에 따른 지급을 금지하는 것은 직접적인 당사자를 넘어서는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하였습니다. 이행보증과 같은 금융수단은 건설 및 인프라 프로젝트에서 위험배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그 상업적 가치는 지급의 확실성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강력한 정당사유 없는 법원의 관여는 이행보증의 기능을 저해할 위험을 내포하며, 법원은 이러한 고려사항에 비추어 다른 요소들이 균형 있게 작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처분신청을 기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등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확립된 원칙을 명확히 재확인하였습니다. On-demand 이행보증채권과 관련하여 임시구제를 발행은행 상대로 구할 경우, 사기행위가 없는 한 해당 신청은 기각됩니다. 당사자들은 자신의 주장의 성격을 처음부터 명확히 하여야 하며 분쟁이 기초계약상 발주자의 본드 콜 권한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상대를 수익자로 정하는 것이 적절한 대응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본 판결은 아울러 이행보증상의 인증 메커니즘이 갖는 중요성을 확인하였습니다. 당사자 사이 인증서를 통해 책임이 확정적으로 증명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 영국 법원은 해당 합의에 효력을 부여합니다. 금액, 상계 또는 기초권리에 관한 주장은 지급을 막지 못하며 후속 절차를 통해 해결될 사안으로 분류됩니다.
대응의 시기 역시 중요합니다. 시공자가 구제수단을 강구하고 본드 콜에 대응하는 데 있어 지연이 있을 경우 이는 법원의 고려대상이 되므로 계약 해지, 지체상금 또는 인증서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당사자는 신속하게 대응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원칙들은 초국경 거래 및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국제 금융 시스템을 통해 발행되는 금융수단 (예컨대 선급금보증, 유보금보증, 스탠바이 신용장 및 역보증) 중 영국법의 적용을 받는 금융수단에 동등하게 적용됩니다. 해외 건설 프로젝트에서 활동하는 한국 시공자 및 사업주는, 사기행위가 없는 한 이러한 금융수단에 따른 지급이 이행되며 기초계약상 권한에 관한 분쟁은 지급을 저지하지 못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행보증 조항을 신중하게 작성하고 수익자를 상대로 한 분쟁해결 수단을 적시에 활용하는 등, 이에 맞는 위험관리 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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